5학년인 막내는 요즘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학교에 가고, 나머지는 화상 수업을 한다. 늘 집에 있다가 모처럼 학교에 가면, 제일 하고 싶은 건 체육이다. 그래서 학교 가는 날 비가 올까, 미세먼지가 심할까, 날씨를 신경쓰게 된다.
막내는 유독 피구를 좋아한다. 공격엔 약하지만, 작은 체구로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끝까지 살아남는 게 특기이다. 마지막 남은 1인이 돼서 친구들로부터 인정받는 게 최고로 신나는 일이다. 피구를 한 날은 귀가하자마자 숨차게 피구 얘기부터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잘 피해다녔는지, 그래서 얼마나 우쭐했는지를 말한다. 체구가 작고 운동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서 다른 체육은 싫어하면서도 이렇게 작은 체구의 강점을 발휘하고 체육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런데 매일 체육을 했으면 하는 바람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체육을 못 하는 날이 더 많다. 학교 가는 날이 몇일 안되니 그 간에 밀린 진도 나가느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아이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거리두기 때문인지 체육관 사용이 원활하지 않아보였다. 1학년 후배들이 매일 학교에 나오는데, 그 아이들이 체육관을 더 많이 쓴다는 거다. 그래서 1학년 아이들 때문에 체육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1학년 아이들이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1학년 애들이 체육관 다 쓰고, 1학년 때문에 피구도 못하고. 1학년 애들 짜증나!"라는 말을 한다. 피구를 못하는 아쉬움이 1학년에게 불똥으로 튄거다. 이 말을 듣고 아빠의 반응은 "야, 아빠 때는 체육관도 없었어."라고 했고, 언니는 "1학년 애들은 어린데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라고 했다. 막내는 더 화가 나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방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대화를 건너 들은 나는 대화에 끼어들어 막내 편을 들어주었다. "아니, 우리 OO이는 피구 못해서 아쉽다고 하는건데, 왜 거기서 체육관 얘기가 나오고 양보 얘기가 나오는거야? 으이구, 우리 OO이 마음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네" 이 말에 막내는 좀 화가 누그러지는 듯 해 보였다. 다른 식구에게 면박을 준 셈이지만, 이 순간 만큼은 막내의 편이 되어 주고 싶었다.
공감이라는 게 참 어렵다. 공감이 중요하다는데 어떻게 공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해 놓고도 그게 공감인지 아닌지 아리송할 때도 있다. 한 때는 "그랬구나~"라는 공감의 말이 유행하면서, 부모가 "그랬구나"라고 말하면 아이들이 "엄마 또 어디서 교육받고 왔어?"라는 의심을 하게 되는, 일명 '그랬구나 병'이 유행할 때도 있었다. 공감의 형식만 남고 알맹이는 사라진 것이다.
알맹이가 살아있는 '공감'을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태도가 '경청'이다. 먼저 조용히 잘 듣는다. 아이에게 말할 기회를 최대한 준다. 들었는데도 잘 모르겠으면 물어보고 확인을 한다. 때로는 오해와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으로 질문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확인을 위한 질문이, 질문자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질문이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식의 육하원칙식 질문을 하면 취조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이야기의 흐름도 끊길 수 있다. 특히 '왜?'라는 질문은 피하는 것이 좋다. 대신 할 수 있는 질문으로는 '어떻게 해서?' 정도가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도 쉽지 않다. 이도 저도 어렵다면 그냥 눈을 맞추고 아이의 말에 몰입해서 그냥 잘 들어주면 된다. 이렇게 '경청'을 하는 것 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맥락 속에서 아이가 경험한 것이 이해될 때 '그랬구나~'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이것이 '공감'이 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공감'이 더 잘 이해가 된다. 내가 힘들 때, 가만히 옆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위안이 될까. 눈을 맞추고 들어주는 암묵적인 들어주기가 '괜찮아', '잘 될거야.' 라는 백 마디 말보다 더 격려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경청'은 가장 훌륭한 '공감'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막내가 '1학년 애들이 짜증나'라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도록 두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도 하지 못한 얘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그런데 듣는 사람이 한 발 더 나아가, 그랬구나. 그래서 속상했겠구나 하면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될까. 자기가 잘 하는 피구로 인정받고 싶은데, 그 기회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아쉬울까. 그 마음을 알기위해서 '경청'이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 모 TV 프로그램에서 김태호PD, 나영석PD 등 스타PD들과 함께 작업을 했었던 작가에게 그들의 특징이 있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작가는 "회의를 하거나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그걸 계속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분들은 진짜로 다 듣는다"라고 존경심을 표한적이 있다. 그러면서 덧붙여 개그맨 유재석씨도 잘 들어주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존경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잘 들어준다는 점이다. 잘 들어주는 누군가와 함께 한 경험이 많은 아이가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아이가 될 것이다. 내 아이가 큰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5학년인 막내는 요즘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학교에 가고, 나머지는 화상 수업을 한다. 늘 집에 있다가 모처럼 학교에 가면, 제일 하고 싶은 건 체육이다. 그래서 학교 가는 날 비가 올까, 미세먼지가 심할까, 날씨를 신경쓰게 된다.
막내는 유독 피구를 좋아한다. 공격엔 약하지만, 작은 체구로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끝까지 살아남는 게 특기이다. 마지막 남은 1인이 돼서 친구들로부터 인정받는 게 최고로 신나는 일이다. 피구를 한 날은 귀가하자마자 숨차게 피구 얘기부터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잘 피해다녔는지, 그래서 얼마나 우쭐했는지를 말한다. 체구가 작고 운동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서 다른 체육은 싫어하면서도 이렇게 작은 체구의 강점을 발휘하고 체육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런데 매일 체육을 했으면 하는 바람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체육을 못 하는 날이 더 많다. 학교 가는 날이 몇일 안되니 그 간에 밀린 진도 나가느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아이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거리두기 때문인지 체육관 사용이 원활하지 않아보였다. 1학년 후배들이 매일 학교에 나오는데, 그 아이들이 체육관을 더 많이 쓴다는 거다. 그래서 1학년 아이들 때문에 체육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1학년 아이들이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1학년 애들이 체육관 다 쓰고, 1학년 때문에 피구도 못하고. 1학년 애들 짜증나!"라는 말을 한다. 피구를 못하는 아쉬움이 1학년에게 불똥으로 튄거다. 이 말을 듣고 아빠의 반응은 "야, 아빠 때는 체육관도 없었어."라고 했고, 언니는 "1학년 애들은 어린데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라고 했다. 막내는 더 화가 나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방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대화를 건너 들은 나는 대화에 끼어들어 막내 편을 들어주었다. "아니, 우리 OO이는 피구 못해서 아쉽다고 하는건데, 왜 거기서 체육관 얘기가 나오고 양보 얘기가 나오는거야? 으이구, 우리 OO이 마음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네" 이 말에 막내는 좀 화가 누그러지는 듯 해 보였다. 다른 식구에게 면박을 준 셈이지만, 이 순간 만큼은 막내의 편이 되어 주고 싶었다.
공감이라는 게 참 어렵다. 공감이 중요하다는데 어떻게 공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해 놓고도 그게 공감인지 아닌지 아리송할 때도 있다. 한 때는 "그랬구나~"라는 공감의 말이 유행하면서, 부모가 "그랬구나"라고 말하면 아이들이 "엄마 또 어디서 교육받고 왔어?"라는 의심을 하게 되는, 일명 '그랬구나 병'이 유행할 때도 있었다. 공감의 형식만 남고 알맹이는 사라진 것이다.
알맹이가 살아있는 '공감'을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태도가 '경청'이다. 먼저 조용히 잘 듣는다. 아이에게 말할 기회를 최대한 준다. 들었는데도 잘 모르겠으면 물어보고 확인을 한다. 때로는 오해와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으로 질문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확인을 위한 질문이, 질문자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질문이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식의 육하원칙식 질문을 하면 취조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이야기의 흐름도 끊길 수 있다. 특히 '왜?'라는 질문은 피하는 것이 좋다. 대신 할 수 있는 질문으로는 '어떻게 해서?' 정도가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도 쉽지 않다. 이도 저도 어렵다면 그냥 눈을 맞추고 아이의 말에 몰입해서 그냥 잘 들어주면 된다. 이렇게 '경청'을 하는 것 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맥락 속에서 아이가 경험한 것이 이해될 때 '그랬구나~'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이것이 '공감'이 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공감'이 더 잘 이해가 된다. 내가 힘들 때, 가만히 옆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위안이 될까. 눈을 맞추고 들어주는 암묵적인 들어주기가 '괜찮아', '잘 될거야.' 라는 백 마디 말보다 더 격려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경청'은 가장 훌륭한 '공감'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막내가 '1학년 애들이 짜증나'라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도록 두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도 하지 못한 얘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그런데 듣는 사람이 한 발 더 나아가, 그랬구나. 그래서 속상했겠구나 하면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될까. 자기가 잘 하는 피구로 인정받고 싶은데, 그 기회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아쉬울까. 그 마음을 알기위해서 '경청'이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 모 TV 프로그램에서 김태호PD, 나영석PD 등 스타PD들과 함께 작업을 했었던 작가에게 그들의 특징이 있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작가는 "회의를 하거나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그걸 계속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분들은 진짜로 다 듣는다"라고 존경심을 표한적이 있다. 그러면서 덧붙여 개그맨 유재석씨도 잘 들어주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존경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잘 들어준다는 점이다. 잘 들어주는 누군가와 함께 한 경험이 많은 아이가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아이가 될 것이다. 내 아이가 큰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