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은 어촌마을이었다.
당시엔 세대수가 제법 되는 큰 동네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갯벌에서 굴을 따거나, 게와 쏙을 잡고, 파래를 펴말려서 김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동네에 들어서면 비릿한 갯내가 후각을 자극했고, 어딜가나 굴껍데기가 무더기로 쌓여있거나 길에 깔려있었다. 일년동안 씨를 뿌리고 수확하기를 기다려 계절이 바뀌어야만 먹을 것이 나오는 땅농사에 비해 갯벌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래서인지 외갓집이 있는 동네는 크고 길도 넓었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유치원도 있고, 동네 편의점 같은 점빵도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집에서 외갓집까지 가려면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완행버스에서 타고 정류장에 내려 기찻길까지 한참을 걸어야했다. 기찻길을 지나 동네 입구 유치원을 거쳐서, 갯벌 근처 작은 마을까지 가야 비로소 파란색 지붕의 외갓집이 보였다. 가장 큰 고비는 기찻길까지다. ''엄마~다 와 가요?''하고 물으면 엄마는 늘 ''저기~기차길까지만 가면 금방이지'' 하고 말하며 나를 달랬다.
내가 7살 때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겼다. 이제 초등학교에도 가야하고 공부도 해야하니 유치원에 다녀야하기 때문이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자랐던 동네는 읍내에서도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동네였다. 나는 늦둥이 막내였고, 언니들은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다. 내 또래 친구는 없고 나랑 잘 놀던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들이 다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늘 혼자였다. 엄마 아빠도 농사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외갓집에서 1년을 지내며 유치원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있으면 엄마가 곧 데리러 올 거라며 외갓집 옆집에 사는 금아랑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하고 엄마는 집으로 가셨다.
병아리색 모자와 유치원 가방을 받고 설레였던 것도 잠시. 나는 몇 일 지나지 않아 자꾸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다. 유치원은 동네 어귀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가면 기찻길이 보였다. 아이들과 놀다가도 문득 기찻길쪽을 바라보며 행여 엄마가 오시나 살폈다. 기찻길은 조금 오르막길에 있었고 사람들이 건너는 쪽으론 기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차단기가 있었다. 기찻길을 넘어가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그 기찻길을 넘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기찻길이 엄마와 나 사이를 막아놓고 있는 것 같았다. 7살이 엄마, 아빠 없이 견딜 수 있는 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매일 울던 나는 병이 났다. 아파서 유치원도 못가고 유치원 앞에 있던 외삼촌네 점빵에 누워서 엄마 아빠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나는 한 달도 못되어 유치원을 중퇴하고 아빠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유치원도 점빵도 없었지만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는 우리 동네가 제일 좋았다.
지금은 외갓집 옆 기찻길이 없어지고 그곳에는 4차선 큰 도로가 났다. 그 4차선 도로를 차를 타고 지나며 외갓집을 본다. 엄마와 갯벌에서 놀던 좋은 추억도 많았는데 외갓집 동네를 볼 때 엄마, 아빠를 떠나있던 그 일이 먼저 생각나는 걸 보면 그 시절 부모의 부재가 얼마나 아이에게 큰 충격이었을까 생각한다.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였던 조그만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하는 사춘기를 보내고, 완전히 독립해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간 첫째 아린이는 엄마 생각은 하는지 안하는 지 한달이 지나도 필요한 일이 없으면 전화 한 번 하지 않는다. 동생 수린이를 낳는다고 몇 일 외할머니집에 맡겨졌던 4살 때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큰 슬픔으로 남아 있다던 그 아이가 맞나 싶다. 어쩌면 아린이는 엄마, 아빠가 전부였던 그 시기를 마음껏 누렸기에 때가 되어 스스로 그 품을 떠나고픈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집에 와서 엄마가 없으면 쪼르르 전화해 어디냐고 묻고, 밥을 먹다가도 아빠는 언제 오느냐며 오매불망 기다리는 9살 하린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귀찮다 생각말고 기꺼이 누려야겠다.
외갓집은 어촌마을이었다.
당시엔 세대수가 제법 되는 큰 동네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갯벌에서 굴을 따거나, 게와 쏙을 잡고, 파래를 펴말려서 김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동네에 들어서면 비릿한 갯내가 후각을 자극했고, 어딜가나 굴껍데기가 무더기로 쌓여있거나 길에 깔려있었다. 일년동안 씨를 뿌리고 수확하기를 기다려 계절이 바뀌어야만 먹을 것이 나오는 땅농사에 비해 갯벌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래서인지 외갓집이 있는 동네는 크고 길도 넓었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유치원도 있고, 동네 편의점 같은 점빵도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집에서 외갓집까지 가려면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완행버스에서 타고 정류장에 내려 기찻길까지 한참을 걸어야했다. 기찻길을 지나 동네 입구 유치원을 거쳐서, 갯벌 근처 작은 마을까지 가야 비로소 파란색 지붕의 외갓집이 보였다. 가장 큰 고비는 기찻길까지다. ''엄마~다 와 가요?''하고 물으면 엄마는 늘 ''저기~기차길까지만 가면 금방이지'' 하고 말하며 나를 달랬다.
내가 7살 때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겼다. 이제 초등학교에도 가야하고 공부도 해야하니 유치원에 다녀야하기 때문이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자랐던 동네는 읍내에서도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동네였다. 나는 늦둥이 막내였고, 언니들은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다. 내 또래 친구는 없고 나랑 잘 놀던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들이 다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늘 혼자였다. 엄마 아빠도 농사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외갓집에서 1년을 지내며 유치원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있으면 엄마가 곧 데리러 올 거라며 외갓집 옆집에 사는 금아랑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하고 엄마는 집으로 가셨다.
병아리색 모자와 유치원 가방을 받고 설레였던 것도 잠시. 나는 몇 일 지나지 않아 자꾸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다. 유치원은 동네 어귀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가면 기찻길이 보였다. 아이들과 놀다가도 문득 기찻길쪽을 바라보며 행여 엄마가 오시나 살폈다. 기찻길은 조금 오르막길에 있었고 사람들이 건너는 쪽으론 기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차단기가 있었다. 기찻길을 넘어가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그 기찻길을 넘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기찻길이 엄마와 나 사이를 막아놓고 있는 것 같았다. 7살이 엄마, 아빠 없이 견딜 수 있는 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매일 울던 나는 병이 났다. 아파서 유치원도 못가고 유치원 앞에 있던 외삼촌네 점빵에 누워서 엄마 아빠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나는 한 달도 못되어 유치원을 중퇴하고 아빠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유치원도 점빵도 없었지만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는 우리 동네가 제일 좋았다.
지금은 외갓집 옆 기찻길이 없어지고 그곳에는 4차선 큰 도로가 났다. 그 4차선 도로를 차를 타고 지나며 외갓집을 본다. 엄마와 갯벌에서 놀던 좋은 추억도 많았는데 외갓집 동네를 볼 때 엄마, 아빠를 떠나있던 그 일이 먼저 생각나는 걸 보면 그 시절 부모의 부재가 얼마나 아이에게 큰 충격이었을까 생각한다.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였던 조그만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하는 사춘기를 보내고, 완전히 독립해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간 첫째 아린이는 엄마 생각은 하는지 안하는 지 한달이 지나도 필요한 일이 없으면 전화 한 번 하지 않는다. 동생 수린이를 낳는다고 몇 일 외할머니집에 맡겨졌던 4살 때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큰 슬픔으로 남아 있다던 그 아이가 맞나 싶다. 어쩌면 아린이는 엄마, 아빠가 전부였던 그 시기를 마음껏 누렸기에 때가 되어 스스로 그 품을 떠나고픈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집에 와서 엄마가 없으면 쪼르르 전화해 어디냐고 묻고, 밥을 먹다가도 아빠는 언제 오느냐며 오매불망 기다리는 9살 하린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귀찮다 생각말고 기꺼이 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