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이 된 아이는 학교 반 친구들과 롯데월드에 가기로 했다. 근처에 살아서 아이는 연간 이용권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인원이 15명이나 되어 4명, 6명, 5명 조를 짜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런데 롯데월드에 가기로 한 날이 임박해서 담임 선생님께 장문의 문자가 왔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걱정되니 보호자가 동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기를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쉽지만 롯데월드는 못 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반응은 달랐다. 아이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담임 선생님이 오해하신 거니 잘 설명하면 된다고 했다. 조별로 다니니 소수 인원이 가는 거와 다를 바 없고 롯데월드에서 문제가 될 일도 전혀 없으니 선생님을 설득할 거라고 오히려 의지를 불태웠다. 안 가겠다고 하는 애들도 생겼는데 조는 다시 짜면 되니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으니 너도 가지 말라고 한다면 아이는 반항을 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롯데월드를 가는 데 찬성할 수도 없었다. 선뜻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엄마가 못마땅한지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퇴근한 남편에게 의견을 물었다.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면 괜히 찍히는 거 아니야?” 남편의 반응 역시 나와 비슷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가장 공감하기 힘든 사람은 나의 딸이다. 어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반응이 나와 180도 다를 때가 종종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런 면에 당황했지만 이제 중학생이 되니 걱정이 된다. 아이는 어른들의 말이라고 무조건 맞는 게 아니며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맞는 것도 아니라며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지시에는 따를 생각이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머리로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아이의 이런 태도는 나의 불안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공감까지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숙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문제를 해결하며 한고비 한고비 넘는 스무 고개 같은 길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듯 수십 년 전에 헤어졌던 혈육을 찾은 것처럼 쪼개졌던 내 심장의 일부를 찾는 뜨거운 설렘과 횡재의 길이기도 하다. p.243(<당신이 옳다>정혜신,해냄)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체벌이 흔했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사소한 일로 친구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는데 당시의 공포는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권위에 대한 순종이 몸에 배었고 아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권위적으로 대하면 반발하면서 도리어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나는 학교에서는 혼나지 않으려고 애쓰고 집에서는 예민한 엄마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눈치를 봤다. 그래서인지 내 기분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는 듯한 아이의 태도를 볼 때면 엄마 마음에 들려고 전전긍긍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억울해진다. 아이의 마음에 닿아보려 헤매는 길에 어린 시절의 나와 그 속에 해결되지 않은 묵은 감정들을 만난다. 저자는 이 과정을 “수년 전에 헤어졌던 혈육을 찾은 것처럼 쪼개졌던 내 심장의 일부를 찾는 뜨거운 설렘과 횡재의 길이기도 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아파서 외면하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학생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데 초점을 맞춘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맘속에는 아이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교칙을 잘 지키는 모범생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어린 시절 어른들 눈 밖에 날까 두려워한 그 마음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어른들이 그어 놓은 선에 질문을 던지는 아이를 보면 불안하다. 정혜신 박사는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같은 책 121쪽)라고 한다. 공감하기 힘든 아이 덕분에 ‘무겁고 복잡한 과정’을 통과 중인 것 같다. 그 뒤에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경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그 말을 믿어보자. 아이에게 섣불리 불안을 투사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찬찬히 살피며 ‘너도 옳고 나도 옳다’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날을 기다린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아이는 학교 반 친구들과 롯데월드에 가기로 했다. 근처에 살아서 아이는 연간 이용권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인원이 15명이나 되어 4명, 6명, 5명 조를 짜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런데 롯데월드에 가기로 한 날이 임박해서 담임 선생님께 장문의 문자가 왔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걱정되니 보호자가 동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기를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쉽지만 롯데월드는 못 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반응은 달랐다. 아이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담임 선생님이 오해하신 거니 잘 설명하면 된다고 했다. 조별로 다니니 소수 인원이 가는 거와 다를 바 없고 롯데월드에서 문제가 될 일도 전혀 없으니 선생님을 설득할 거라고 오히려 의지를 불태웠다. 안 가겠다고 하는 애들도 생겼는데 조는 다시 짜면 되니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으니 너도 가지 말라고 한다면 아이는 반항을 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롯데월드를 가는 데 찬성할 수도 없었다. 선뜻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엄마가 못마땅한지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퇴근한 남편에게 의견을 물었다.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면 괜히 찍히는 거 아니야?” 남편의 반응 역시 나와 비슷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가장 공감하기 힘든 사람은 나의 딸이다. 어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반응이 나와 180도 다를 때가 종종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런 면에 당황했지만 이제 중학생이 되니 걱정이 된다. 아이는 어른들의 말이라고 무조건 맞는 게 아니며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맞는 것도 아니라며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지시에는 따를 생각이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머리로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아이의 이런 태도는 나의 불안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공감까지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숙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문제를 해결하며 한고비 한고비 넘는 스무 고개 같은 길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듯 수십 년 전에 헤어졌던 혈육을 찾은 것처럼 쪼개졌던 내 심장의 일부를 찾는 뜨거운 설렘과 횡재의 길이기도 하다. p.243(<당신이 옳다>정혜신,해냄)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체벌이 흔했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사소한 일로 친구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는데 당시의 공포는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권위에 대한 순종이 몸에 배었고 아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권위적으로 대하면 반발하면서 도리어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나는 학교에서는 혼나지 않으려고 애쓰고 집에서는 예민한 엄마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눈치를 봤다. 그래서인지 내 기분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는 듯한 아이의 태도를 볼 때면 엄마 마음에 들려고 전전긍긍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억울해진다. 아이의 마음에 닿아보려 헤매는 길에 어린 시절의 나와 그 속에 해결되지 않은 묵은 감정들을 만난다. 저자는 이 과정을 “수년 전에 헤어졌던 혈육을 찾은 것처럼 쪼개졌던 내 심장의 일부를 찾는 뜨거운 설렘과 횡재의 길이기도 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아파서 외면하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학생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데 초점을 맞춘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맘속에는 아이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교칙을 잘 지키는 모범생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어린 시절 어른들 눈 밖에 날까 두려워한 그 마음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어른들이 그어 놓은 선에 질문을 던지는 아이를 보면 불안하다. 정혜신 박사는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같은 책 121쪽)라고 한다. 공감하기 힘든 아이 덕분에 ‘무겁고 복잡한 과정’을 통과 중인 것 같다. 그 뒤에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경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그 말을 믿어보자. 아이에게 섣불리 불안을 투사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찬찬히 살피며 ‘너도 옳고 나도 옳다’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날을 기다린다.